엑셀, 잘한다는 착각에서 깨어난 순간
입사 초반엔 나름 엑셀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VLOOKUP도 쓸 줄 알고 피벗 테이블도 만들 수 있었으니까.
면접 때도 자신 있게 "엑셀 중급 이상 가능합니다"라고 썼었다.
근데 회사 생활을 하면 할수록 깨달았다.
엑셀을 쓸 줄 아는 것과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첫 번째 좌절
어느 월요일 오전, 팀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번 주까지 지난 분기 매출 데이터 정리해서 보고서 만들어줄래? 간단한 거니까 금방 될 거야."
간단하다고 하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데이터는 이미 있고 합계 내고 그래프 몇 개 그리면 끝일 거라고.
막상 파일을 열어보니 현실은 달랐다.
여러 지점에서 올라온 엑셀 파일들은 형식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파일은 날짜 형식이 "2024-03-15"인데 다른 파일은 "2024.03.15"였고,
또 어떤 건 "03/15/24"였다.
제품명도 어떤 곳은 띄어쓰기가 있고 어떤 곳은 없고...
결국 데이터 정리하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합계 내는 건 5분이면 됐지만 그 전 단계에서 막혔던 거다.
팀장님께 "거의 다 됐습니다"라고 보고드리면서도 속으로는 '이게 정말 간단한 일이었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두 번째 좌절
몇 달 뒤, 조금 더 큰 프로젝트가 들어왔다.
고객 만족도 설문 데이터를 분석해서 인사이트를 뽑아내는 일이었다.
자신 있게 시작했다. 데이터 정리도 이제 익숙해졌고 피벗 테이블로 집계하고
그래프도 예쁘게 만들었다.
평균도 내고 비율도 계산했다.
그리고 팀장님께 보고를 드렸다.
"음... 그래서 이게 의미 있는 차이인 건가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지 확인해봤어요?"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통계적 유의성?
그게 뭔지는 알겠는데 엑셀에서 어떻게 확인하는 건지 몰랐다.
T-검정이니 카이제곱이니 하는 용어들은 대학 때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실제로 어떻게 쓰는지는...
결국 그날 저녁 유튜브와 구글을 뒤지며 통계 함수들을 찾아봤다.
TTEST, CHITEST... 함수 이름은 어렵지 않은데 이걸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가 문제더라.
그때 깨달았다. 엑셀 함수를 많이 안다고 해서 데이터 분석을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걸.
오히려 이 데이터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게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건 엑셀 실력이 아니라 통계적 사고력의 문제였다.
세 번째 좌절
엑셀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작업 속도는 빨라졌다. 데이터 정리도 합계 내는 것도 그래프 그리는 것도 이제는 손에 익었다. 근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빨리 하다 보니 실수가 잦아진 거다.
어느 날 중요한 회의 자료를 만들고 있었다. 마감 시간은 다음 날 아침 9시. 저녁 7시에 시작해서 밤 11시쯤 완성했다. "오늘 일찍 끝났네" 하면서 뿌듯해했다.
다음 날 아침 회의실에서 자료를 발표하는데 부장님이 물으셨다.
"어? 이 숫자... 지난달 보고서랑 다른데? 확인해봤어?"
식은땀이 났다. 급하게 만들다 보니 참조 범위를 잘못 지정했던 거다. 한 열을 빠뜨린 채로 SUM 함수를 적용해서 전체 합계가 틀려버렸다. 다행히 큰 결정으로 이어지는 회의는 아니었지만 그날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로 깨달았다. 빠른 것보다 정확한 게 먼저라는 걸.
지금은 어떻게 일하고 있나
지금은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엑셀을 잘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실수 없이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템플릿을 미리 만들어 둔다
자주 하는 작업이 있다면 미리 양식을 만들어놓는다.
매출 집계 보고서,
비용 정산서 등 반복되는 업무는 템플릿으로 저장해두고 데이터만 바꿔 넣으면 된다.
처음 만들 때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나중에 정말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수식보다 표를 활용한다
예전엔 VLOOKUP을 자주 썼는데 요즘은 표 기능을 더 많이 쓴다.
데이터를 표로 만들어두면 범위가 자동으로 확장되고
구조화된 참조를 쓸 수 있어서 수식이 훨씬 읽기 쉽다.
나중에 다시 봐도 이게 뭐였지 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검산은 두 번, 아니 세 번
지금은 작업을 끝내고 나면 꼭 검산을 한다.
전체 합계를 다른 방법으로도 계산해보고
예상 범위 안에 있는지 확인하고 전월이나 전년 데이터와 비교도 해본다.
귀찮지만 회의실에서 틀린 숫자 발표하는 것보단 백배 낫다.
복잡한 건 나누어서 한다
한 셀에 너무 복잡한 수식을 넣지 않는다.
예전엔 한 줄로 다 해결하면 멋있잖아 하면서
IF 안에 IF를 넣고 거기에 VLOOKUP까지 섞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다.
이제는 중간 계산 열을 만들어서 단계별로 나눠서 계산한다.
나중에 확인하기도 쉽고 오류 찾기도 훨씬 편하다.
통계는 무리하지 않는다
통계적 검정이 필요한 일이면 솔직하게
"이 부분은 제가 더 공부가 필요합니다" 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아니면 애초에 통계 업무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나는 데이터 정리와 시각화에 집중하는 식으로.
모든 걸 다 잘할 필요는 없더라.
지금도 머리 아플 때
지금도 여전히 엑셀 때문에 머리 아플 때가 많다.
전임자가 급하게 만들었거나 여러 사람이 손을 댄 파일을 받으면... 정말 머리가 지끈거린다.
수식은 절대참조와 상대참조가 뒤죽박죽이고 시트 이름은 "최종", "최종2", "진짜최종"이고
숨겨진 시트와 열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숫자로 보이는데 텍스트로 저장돼 있거나 날짜가 숫자로 표시되거나...
이런 형식 문제는 정말 찾기도 어렵고 고치기도 까다롭다.
특히 다른 시스템에서 추출한 데이터는 거의 항상 뭔가 이상한 게 하나씩 있더라.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파일이 점점 무거워진다. 열기만 해도 3분, 저장하는 데 1분...
이런 파일로 일하다 보면 작업 속도보다 대기 시간이 더 길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거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게 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이렇게 하소연만 늘어놓았지만 사실 엑셀 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간단한 계산부터 복잡한 데이터 분석까지 회사 업무의 80%는 결국 엑셀로 귀결되니까.
다만 이제는 안다.
엑셀을 잘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일을 잘하기 위해 엑셀을 쓰는 거라는 걸.
함수 100개를 외우는 것보다 자주 쓰는 10개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수 없이 쓰는 게 더 중요하다.
복잡한 수식을 짜는 것보다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하는 게 더 가치 있다.
통계는?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는 건 물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일한다.
괜히 아는 척하다가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솔직하게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게 훨씬 현명한 방법이니까.
엑셀 때문에 오늘도 머리 아픈 분들께. 나도 여전히 헤매고 있다.
완벽한 해답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은 든다.
우리 너무 자책하지 말자.
엑셀이 어려운 게 당연한 거니까. 천천히 하나씩 배워가면 되는 거니까.
'리빙, 육아 정보 > 홈트, 건강,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밀리고 밀리다 결국 포기 상태... 어느 직장인의 우울한 연말연시 생존기 (1) | 2025.12.29 |
|---|---|
| 눈보라를 뚫고 여기까지 온 당신을 칭찬합니다 (연말연시, 나를 위한 위로) (0) | 2025.12.27 |
| 보고서 마감 3시간 전, 목표율과 달성률 그 어딘가에서 멈춘 내 손가락 (0) | 2025.12.26 |
| 홈트레이닝 기구 추천, 사무실과 침대에 두고 쓰는 밴드 후기 (1) | 2025.12.24 |
| 산타를 기다리는 작은 마음들, 그리고 그 뒤의 큰 사랑 (1) | 2025.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