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불명 소장 이상(Unexplained Small Intestine Abnormality)."
의사 선생님의 입에서 그 건조한 단어들이 툭 튀어나온 순간, 나는 환자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때부터 나는 '진짜로' 아프기 시작했다.
사실 병원을 찾기 전까지만 해도 "요즘 좀 소화가 안 되나?" 정도의 가벼운 불편함이었다.
하지만 차트에 적힌 저 모호하고도 불길한 병명을 마주한 직후부터, 내 몸은 마치 그 진단에 부응하려는 듯 급격히 무거워졌다.
병명(病名)이라는 주문, '노시보 효과'
심리학에는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는 말이 있다.
플라시보의 반대말이다.
의사의 부정적인 진단이나 비관적인 예측을 듣는 순간,
심리적 불안으로 인해 실제로 증세가 악화되거나 없던 통증까지 느끼게 되는 현상이다.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의사의 말이 마치 저주처럼 뇌리에 박혀버렸다. "원인 불명"이라는 말은 내게 "해결책 없음"처럼 들렸고, "이상"이라는 단어는 내 몸 어딘가 고장 났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때부터 내 뇌는 몸이 보내는 아주 작은 신호도 '고통'으로 번역해서 송출하기 시작했다.
확증 편향, 내 불안을 증명하려 애쓰는 마음
더 무서운 건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의 덫이다.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만 수집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지금 소장에 큰 문제가 있어."라는 전제를 깔아두니, 평소라면 무시했을 뱃속의 꼬르륵 소리조차 병의 증거로 채택된다.
조금만 피곤해도, 밥맛이 조금만 없어도 "거봐, 내 병이 깊어지고 있는 거야"라고 결론 짓는다.
객관적인 통증의 크기보다, 내 마음이 만들어낸 공포의 크기가 나를 더 짓누른다.
심리적 위축은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떨어진 면역력은 다시 불안을 부르는 악순환. 나는 스스로를 '중환자'라는 감옥에 가두고 있었다.
침묵이 두려워 꽂은 이어폰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내가 선택한 진통제는 약이 아니라 '이어폰'이었다.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된다.
조용하면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나를 잠식하니까.
그래서 나는 출퇴근길은 물론이고, 집에서도 쉴 새 없이 귀를 막는다.
넷플릭스 드라마의 자극적인 대사들, 라디오 DJ의 수다, 팟캐스트의 정보들...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머릿속에 '빈 공간'을 남기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외부의 소음을 쏟아붓는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 생각할 거리를 주입하는 아이러니. 귀는 시끄러운데 마음은 점점 더 고요한 지옥으로 빠져든다.
이제는 귀를 열고, 마음을 다독일 시간
문득, 이어폰을 뺀 세상의 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그리고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소장의 이상이 아니라 **'내 마음의 해석'**이라는 것을.
'원인 불명'이라는 말은 불치병이라는 뜻이 아니다. 단지 아직 명확한 이름을 찾지 못했을 뿐,
내 몸은 여전히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제 억지로 채워 넣던 드라마 소리를 끄고, 내 몸이 보내는 소리에 정직하게 귀 기울여 보려 한다.
불안해서 증폭시킨 가짜 통증 말고, 내 몸이 진짜로 원하는 휴식이 무엇인지 들어볼 참이다.
노시보 효과를 이기는 건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을 수 있다'는 단단한 자기 확신일 테니까. 오늘 밤은 이어폰 대신, 내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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